장 미셸 바스키아, 그에게 복싱이란 어떤 의미였을까(작품 속 복서) /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 / 조루이스, 슈가레이로빈슨
미국 사회의 풍자를 담으며 '검은 피카소'란 닉네임을 얻었던 장미셸바스키아.
바스키아의 작품을 보면 왕왕 등장하던 복서, 왜 그는 복서라는 주제를 선택했을까?
바스키아의 그림들 속에서 복서는 어떤 존재였고, 누구였고, 왜 복서라는 주제를 선택했었는지 짧고 굵었던 그의 생애에 몇가지 작품을 선별해보았다.
어두웠던 유년기
어두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바스키아는 어릴 적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보고 화가가 되기를 결심했다고 한다.
머리가 무척 좋았던 바스키아는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11살 쯤엔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등 3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고.
어릴 적 심한 교통사고를 당한 후, 부모님의 불화는 이혼으로 이어졌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 |
출생 | 1960년 12월 22일(미국 뉴욕 주 뉴욕시 브루클린) |
사망 | 1988년 8월 12일(향년 27세)(미국 뉴욕 주 뉴욕시) |
국적 | 미국 |
직업 | 현대미술가, 그래피티 아티스트 |
활동 | 1980년대초~1988년 |
SAMO 시작과 끝
우울한 유년기를 보냈던 바스키아는 15살이 되던 해에 집을 나와 친구 집에서 자거나 노숙을 하며 자신의 그림이 그려진 엽서나 티셔츠를 팔며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했다.
1980년대 당시 브레이크댄스나 펑크족, 레게나 힙합 등 흑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래피티를 시작하게 된다.
1976년 그래피티 아티스트였던 알디자이를 만나게 되는데 바스키아와 알디아즈는 마리화나에 취한상태로 장난스런 문구를 만듭니다.
사적 농담으로 시작해 SAMO(Same Old shit)를 결성하고 건물 외벽에 그의 작품을 남기기 시작했다.
SAMO(Same Old shit) - 흔해 낡아빠진 것
1978년 죽이 척척 맞던 알 디자이즈와의 관계는 끝이나고 1979년 소호의 건물 외벽에 'SAMO IS DEAD'라는 글씨와 함께 SAMO의 끝을 알렸다.
앤디워홀을 만나다.
바스키아를 설명하며 앤디워홀을 빼놓을 수 없다.
SAMO가 끝이는 이 후에 뉴욕현대미술관 앞에서 엽서와 티셔츠 위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게 되고, 또한 맨해튼의 이스트 빌리지의 미술대학(시각예술학교)를 다니던 이들과 유흥가에서 어울렸고, 특히 이 시기 키스 해링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1980년 바스키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인물, 앤디워홀을 만나게 된다.
앤디워홀에게 본인을 '신예 예술가'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낙서가 담긴 엽서를 팔게 되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된다.
바스키아가 자신의 그림을 10달러에 강매하려고 했는데, 워홀은 너무 대충 그린 그림이라며 거절했었다. 당시 바스키아가 '당신의 그림도 그렇잖아요?'라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다.
바스키아에게 복싱이란
바스키아에게 복싱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가 남긴 많은 작품들 속에서(혹은 본인이) 글러브를 낀 작품을 왕왕 볼수 있다.
인종차별이 난무하던 사회에서 바스키아는 '히스패닉(중남미계 미국 이주민들)영웅'(전설적인 흑인 스포츠스타)을 작품에 자주 등장시켰다.
복싱이라는 스포츠, 유명한 흑인 운동 선수의 투쟁은 바스키아의 반복되는 주제이기도 했다.
이 영웅들은 바스키아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던 인권운동가, 복싱선수였는데 인권운동가는 정치적으로, 복싱선수는 물리적 압박으로부터 '저항'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바스키아의 대내외적으로 종합했을 때 그의 정체성은 '저항'하는 사람이었다.
I am not a black artist, I am an artist.
난 흑인 아티스트가 아니라 아티스트야.
어릴 적부터 받아온 학대와 차별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비폭력적/예술적으로 표출하고 투영시키며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Untitled(Boxer), 1982년, 리넨 위에 아크릴과 유성 페이트 스틱, 193*239cm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서로 평가되는 슈거레이로빈슨, 무하마드알리 이전까지 가장 위대한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조 루이스, 온갖 차별 속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였던 재키로빈슨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바스키아의 작품 주제였다.
작품 속 복서들
Joe Luis Surrounded by Snakes, 1982년, 캔버스에 아크릴, 오일스틱 콜라주, 101.5*101.5cm
갈색 폭격기로 불렸던 조 루이스는 무하마디 알리 이전 가장 유명한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1938년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독일의 막스슈멜링을 이기며 유명세를 탔으며, 무려 12년간이나 헤비급 타이틀을 보유했던 전설적인 복서였다.
조루이스 이름 앞에 ST(Saint,성스러움)를 붙여 성스러운 '영웅'을 묘사한 듯 하다.
Sugar ray robinson(boxer), 1982년, 캔버스에 아크릴과 오일스틱, 152,1*122.6cm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영웅적이고 전설적인 강인한 인물, 슈거레이의 모습이다.
강한 정면의 복싱 자세를 취한 슈거레이의 모습이 담긴 작품은 희귀하고 활력이 넘친다.
Untitled(Boxing ring), 1983년, 페이퍼에 오일스틱, 56.2*76.5cm
관객의 표정과 환호 레프트훅을 맞은 상대의 찌릿한 고통이 느껴지는 듯한 표현이 재미있다.
Untitled(Sugar ray robinson), 1982년, 캔버스에 아크릴과 오일스틱, 106.5*106.5cm
슈거 레이 로빈슨은 1940~50년대 미들급 최강의 복서로 20여년에 이르는 선수생활동안 웰터급, 미들급 챔피언을 무려 다섯차례나 차지하는 괴력을 선보이며 이 체급의 최강자로 군림했었다.
최고 전성기인 11년 동안에는 무려 127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연승을 하기도 했었다.
검은색 바탕 위에 왕관을 쓴 슈거레이의 두개골과 이름, 그에게 주어지는 왕관이 경의를 표하는 듯 하다.
당대 가장 유명한 복서 중 한명으로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바스키아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Untitled(Boxer rebellion), 1983년, 스크린 인쇄, 73.7*100.3cm
복서의 반란, 1900년대 중국 복싱 반란(의화단운동)을 다룬 작품으로 영어와 중국으로 뒤 섞인 일련의 단어와 상징을 암호화한 그래피티 스타일의 작품이다.
의화단 운동은 의화단원들이 권법을 중요시하는 것을 보고 선교사들이 '복서 같다'고 한데서 '복서 반란'이라고 불렸다.
참고로 19세기 말~20세기 초 복싱은 기술적으로 소위말하는 막싸움에 가까웠다고 한다.
익숙한 한자와 슈거레이로빈슨 등 문자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I don't think about art when I'm working. I try to think about life.
나는 작업을 할 때 예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삶에 대해 생각하려고 한다.
바스키아를 떠올리면 '반항아' 이미지와 붓으로 무심하게 그린 왕관, 공룡 등이 떠오르겠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훨씬 넓었고 의미는 깊었다.
1980년대 초, 작업을 시작하고 최고의 인기 작가로서 살며 27살 전까지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남긴 작품은 3,000여점 이상이다.
바스키아는 해성처럼 등장해 데뷔와 동시에 성공적인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둘러싼 루머는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앤디워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느니, 동생애자라느니, 흑인으로서의 인종차별 등 루머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1987년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앤디워홀의 비보를 듣게 된다.
어릴 적 심한 교통사고로 몸과 마음이 연약했을 터, 부모님의 불화와 이혼, 정신병원을 전전하시는 어머니와 자신을 내몰아치는 아버지, 세상의 편견과 인종차별로 몸살을 앓았을,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을 그였을 것이다.
앤디워홀의 사망 소식에 큰 충격을 받게 된 바스키아는 약물에 의존하며 지내다 약물중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1988년 12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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